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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정을 느낄 때

 

집 근처 대형마트가 문을 닫았다.

개점한 지 40년 만이라고 한다. 나도 이 동네에 이사 온 지 10년이니 그 마트 역사의 1/4을 함께 한 셈이다.

 

이 동네에서는 상당히 큰 마트였고 과거에는 아주 유명한 영화의 주인공 가족이 쇼핑하는 모습을 찍은 촬영지였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내가 처음 여기 이사왔을 때만 해도 스타벅스와 무인양품이 들어와 있었다.

그러던 것이 근처에 새로운 마트들이 하나둘 들어서며 점점 쓸쓸한 분위기로 변해간다 싶었는데 폐점 소식까지 듣게 된 것이다.

 

10월 31일 오후 6시.

24시간 운영하던 그 마트가 문을 닫는 시간이었다.

 

한 달 전부터 1층 입구 벽에는 그 마트에 대한 추억이나 감사의 메시지를 쓴 메모지들이 붙기 시작했다.

마트 측에서 준비한 것이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벽을 가득 채웠고 나도 오고 가며 하나둘씩 읽어 보았다.

어린아이가 비뚤비뚤 쓴 편지에서부터 애정 가득한 멋진 글까지 마음이 뭉클해지고 어딘가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퇴근 시간이 일정하지 않은 내가 그날 그 시간에 그 앞을 지나간 건 정말로 우연이었다.

역에서 집까지 가려면 그 마트 앞을 지나야 했는데 마트 근처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이차선 도로 건너편까지도 사람들이 가득 모여 있었다.

아, 오늘 10월 31일이지.

놀라서 시간을 확인하니 6시였다.

마트 정문 근처까지 왔을 때 안에서 책임자로 보이는 사람이 나왔고 모여든 사람들을 향해 인사를 했다.

 

"그동안 저희 XXX OO점을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부로..."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마지막 인사에 귀를 기울이는 그 얼굴들에는 서운함과 함께 그동안의 추억과 감사함이 깃들어 있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너무나 감동을 해서 눈물이 났다.

 

그 마트는 한국에서 놀러 온 가족, 친구들이 반드시 들러서 쇼핑을 하던 곳이었다.

아직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는 밤늦은 시간에도 남편과 함께 아이스크림이랑 과자를 사러 달려가던 곳이었다.

아이가 태어나고부터는 더우면 덥다고 추우면 춥다는 이유로 들어가서 아이랑 이것저것 구경하며 시간을 때우던 곳이었다.

 

시간이 지나 사라지는 많고 많은 가게 중 하나가 아니라 내 추억이 담긴 곳, 추억을 만들어 준 곳, 필요할 때 언제나 이용할 수 있는 곳이었던 것을 거기 서 있던 사람들의 눈을 보며 깨달았다.

 

일본 사람들은 한국에 비해 개인주의가 강하고 친절하지만 깊은 정이 없다고 느낄 때도 있지만 생각치도 못한 곳에서 이렇게 훅 정을 느끼는 순간들이 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장소든 그것에 대한 소중하고 감사한 마음이 있을 때에만 나올 수 있는 모습.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걸 잊지 않고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