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는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만났다.
당시의 나는 나쁜 남자와 불타는 연애(나 혼자 불탐)를 하다가 차이고서는 구질구질하게 매달리기를 몇 달, 겨우 맘 잡고 연애 같은 거 별로 흥미도 없는 상황이었다.
남편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과도 거리가 멀었다.
같이 아르바이트를 하기는 하지만 몇 번 얘기를 해 본 적도 없었다. 나에게는 그저 '주변 사람 1' 정도의 존재였다.
어느날 점장 아저씨가 "쟤가 너 좋아해." 이런 소리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쁜 남자와의 연애에 지친 후라서 그런지 기쁘지도 않고 싫지도 않고 '아, 그렇구나.'하는 느낌이었다.
남편은 주변에서 놀리는데도 평소와 변함없었다.
점장 아저씨는 적극적이었다. 우리를 이어주려 애를 썼다.
손님이 없는 어느 날, 내가 집에 빨리 가고 싶다고 했더니 그럼 쟤랑 같이 커피숍 가서 커피 한 잔만 하고 가라고 애원을 했다.
나는 싫다고 하기도 귀찮아서 그냥 그렇게 했다. 남편도 군말없이 따라왔다.
커피숍에 잠시 앉아서 무슨 얘기를 했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그날 처음 휴대폰 메일 주소를 교환했다.
일본은 당시 문자메시지를 쓰지 않고 휴대폰에 등록된 메일을 이용하고 있었다.
그 후 몇 달이 지나고서 남편이 나를 한번 만나자고 한 날이 있었다.
같이 살던 친구가 드디어 고백하려나 보다 하며 더 난리였다.
나는 당일에 누가 만나자고 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집순이 중의 집순이이다.
30분 정도라면 괜찮다고 하며(그냥 거절하면 될 것을) 나갔다.
실제로 나도 은근 얘기 이제 사귀자고 하려나 보다 그런 생각을 했다.
남편은 무슨 프로포즈라도 하는 것처럼 아주 진지한 얼굴로 입을 떼더니,
날 좋아한다고 했다.
그리고 침묵.
끄, 끝?
그 이후의 이야기는?
난 그야말로 어이가 없어서 아주 차가운 말투로 "그래서?"하고 물었다.
남편은 그냥 자기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이제와서 뭐지 이건.
난 30분 다 됐으니 가야 됐다고 일어섰고 그렇게 헤어졌다.
그리고 또 한 두달이 지났나 보다.
어느날 갑자기 전화가 와서는 "다음 주 금요일 저녁에 같이 밥 먹자."하는 것이었다.
나는 또 못 이기는 척 알았다고 했다.
만나기 전에 장소랑 시간을 정해서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같이 살던 친구는 이번에야 말로 분명히 뭔가가 있다며 좋아했다.
그런데 연락이 없었다.
나름 미팅도 많이 했다고 생각하는데, 그동안 썸 타던 남자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문자를 하고 연락을 했었다.
그런데 만나자고 연락을 한 이 남자는 연락이 없었다.
난 불안해졌다. 진짜 만나는 것이 맞나?
데이트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더 불안해지고 스트레스 폭발 직전이었다.
만나기로 한 금요일 당일 너무 짜증나서 약간 눈물이 났다.
그리고 오후 3시쯤 전화가 왔다.
"5시에 이케부쿠로 무슨 커피숍에서 만나자."
두 시간 전에! 정말로 나에게는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설마 두 시간 전에 연락을 줄 줄은 몰랐다.
그렇게 짜증이 나고 스트레스를 받았으면서 그냥 됐다고 하면 될 것을 나는 또 일단 알겠다고 했다.
안타까운 눈빛을 보내는 친구에게는 오늘 나가서 다 끝내고 올거라며 나갔다.(뭘 시작한 적이 없으니 끝내는 것도 이상하지만)
약속 장소인 커피숍에서 남편은 뭔가를 쓰고 있었다.
나는 아주 퉁명스러운 얼굴로 인사도 없이 앉았다.
남편의 얼굴은 아주 해맑았다.
그리고는 쑥스러운 듯이 뭔갈 쓰고 있던 그 종이를 내밀었다.
저녁 먹을 장소를 생각해 봤는데 여기에 쓴 세 곳 중에서 선택을 하라는 것이었다.
장소 이름과 거기에서 갈 레스토랑의 특징도 간단하게 쓰여 있었다.
뭘까, 이건.
지금까지 몇 몇 남자를 만나봤지만 처음이었다, 이런 사람은.
난 화난 얼굴로 말했다.
"2번. 에비스."
에비스의 자메이카 레스토랑에서 자메이카 요리를 먹었다.
자메이카 요리는 처음이었고, 맛있었고, 어느새 기분이 좋아진 나는 쫑알쫑알 떠들어댔고 남편은 웃으면서 들어 주었다.
당시에는 저 사람이 왜 저럴까 많이 생각해 봤었다.
일부러 저러는 건가? 어디가 덜떨어진 걸까? 사회성이 없는 걸까?
지금은 알 수 있다.
원래 저런 사람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