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프라하의 추억

 

엊그제 친구를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생각난 일이 있다.

 

10년 전, 그러니까 2014년에 동유럽 여행을 했을 때의 일이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체코 프라하로 넘어왔다.

도심에서 약간 떨어진 저렴한 호텔을 예약했기 때문에 중앙역에서 그 호텔로 이동을 해야 했다.

그때는 구글맵이 없었다. 아니, 있었겠지만 나도 친구도 그런 걸 잘 모르던 시대였다. 우리는 종이 지도를 보면서 호텔을 찾아가고 있었다.

 

걷는 걸 좋아하니까, 하며 걸어서 30분은 족히 넘어 보이는 거리를 캐리어를 끌며 걸었다.

유럽에 가 본 사람은 알겠지만 아스팔트 길이 별로 없다. (지금은 아닐 수 있음)

울퉁불퉁 돌길에 끼는 캐리어 바퀴를 몇 번이나 빼기를 반복하면서 종이 지도를 확인하며 그렇게 걸었다.

 

나는 길치다. 아마 길치 중에서도 상위권에 들어가는 길치다.

근데 그때는 몰랐다. 내가 길치라는 걸... 난 길도 잘 찾는 그런 똑 부러지는 여자인 줄만 알았다.

친구도 내가 길치라는 걸 그날 알았다고 한다. 걸어서 갈 수 있다고 큰소리 뻥뻥 치고 있었기 때문에 나에게 모든 걸 맡기고 걷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호텔이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뭔가 이게 아니라는 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한 시간 가까이 걸었을 때, 이미 그 지도에서도 우리가 가는 길이 사라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큰 표시로 알 수 있는 건물들도 눈에 띄지 않았다.

 

길치라면 다들 알 것이다.

이게 아니란 걸 느끼면서 직진하게 된다는 걸... 그날 나도 물론 그랬다.

 

여름이었고 아주 더웠고, 그래도 지금보다 10년은 젊었으니까 체력은 있었는데, 믿었던 체력마저 바닥났을 때쯤 친구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누구한테 물어보자."

 

근데 또 그 순간에는 주변에 사람도 없었다.

어, 저 길 건너에 사람 있다. 하면서 신호등을 건너려는데 체코 파란불 3초 만에 빨간불로 바뀐다. 그 이유를 지금도 모르겠다.

아무튼 악 소리 지르면서 캐리어 들고 허둥지둥 신호를 건넜는데 그 사람이 술에 취했는지 들고 있던 술병을 다짜고짜 바닥에 내동댕이쳐 박살 내버리고 하늘을 향해서 막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 말 걸기 전이라서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진짜 친구랑 둘이서 공포 때문에 식은땀을 흘렸다.

빠, 빨리 여기서 사라져야 해... 엮이면 안 돼... 이러면서 살살 뒷걸음질을 치는데 저 뒤 쪽에서 젊은 남자 하나가 나타났다.

 

우리는 마치 아는 사람을 만난 것처럼 그쪽으로 뛰었다.

체력이 바닥난 상황에서 무거운 캐리어를 들고 가볍게 뛰었다.

어? 동양인이네? 현지인처럼 보이는데...

추리닝 같은 반팔 티에 반바지를 입고 밖에 마실 나온 것처럼 혼자 걷고 있는 남자였다.

 

얼굴을 보고 뭔가 느낌이 왔다. 한국 사람 얼굴인데?

친구(일본인)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한국 사람 같은데? 빨리 길 좀 물어봐."라고 했다.

 

다짜고짜 물었다.

 

"혹시 한국 사람이세요?"

"네."

 

헐, 세상에 이 순간에 한국 사람을 만나다니!!

우리에게는 기적과도 같은 순간이었다. 진짜 눈물을 흘릴 뻔했다.

 

사정을 설명하고 호텔이 어느 쪽에 있는지 물었더니

"헉... 완전 다른 방향인데... 걸어서 못 가요."

이러는 거다... 그렇군요...

 

그런데 그는 천사와도 같은 사람이었다.

"잠깐만요, 차가 있는 친구가 있는데 태워줄 수 있는지 좀 물어볼게요."

이러면서 어딘가에 전화를 하는 것이었다.

전화를 끊더니 "친구가 태워 주겠대요.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죠." 이러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사람은 혹시 하느님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친구랑 나랑 그동안 나름 착하게 살았으니까, 찬스 한번 쓰게 해 주신 것 같은?

 

그 사람의 친구를 기다리면서 이것저것 물어봤더니,

본인은 축구를 하는 학생인데 체코에 유학을 왔고, 그 근처가 축구장이라는 것이었다.

 

친구는 금세 차를 끌고 왔고 그 사람이 호텔 위치를 알려주며 우리를 부탁했고 거기에서 헤어져야 했다.

차를 끌고 온 친구(체코 사람인 듯)가 어찌나 짜증을 내는지 정신없이 인사만 하고 차에 올랐다.

 

그게 바로 나의 인생 최대의 실수 베스트 3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연락처를 물어봤어야지!!!

일본으로 초대해서 삼시세끼 대접을 해도 부족할 정도인데ㅠㅠ 그냥 그를 그렇게 보내 버렸다.

 

차를 태워 준 친구는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짜증을 많이 냈다.

그렇게 짜증 나면 첨부터 거절하지 그랬어요...

그래도 우리는 목적지까지 무조건 가야 했기에 조용히 입 다물고 갔다.

 

어떻게 하면 그때의 그 사람을 찾을 수 있을까?

아직도 축구를 하고 있으려나?

혹시나 이 글을 보신다면... 그거야말로 기적이지만... 댓글을 써 줘요...

 

동유럽을 여행하면서 인종차별이 아주 심각했던 체코의 유일한 감동의 기억이다.